무진기행
무진기행 — 안개의 도시로 돌아간 남자, 그는 무엇이 부끄러웠나
- 저자
- 김승옥
- 출판사
- 민음사
작가 소개
4·19를 대학 1학년에 겪은 세대로, 1962년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하자마자 김현·김치수·최하림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만들며 한국어의 감각을 바꿔 놓았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두 상을 모두 거머쥔 작가가 되었지만, 1980년 장편 『먼지의 방』을 연재하던 중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창작 의욕을 잃어 15회 만에 스스로 붓을 꺾었습니다. 이듬해 종교적 계시를 체험한 뒤 끝내 문단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2003년 뇌졸중으로 언어를 잃은 뒤에는 그림과 필담으로 세상과 이야기했습니다. 『무진기행』은 그가 가장 빛나던 시절에 남긴, 안개처럼 걷히지 않는 대표작입니다.
책 속으로
- 1장 1장: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결말에서 시작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 한 남자가 길가의 팻말을 본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소설은 단 한 문장으로 끝난다 —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서른세 살의 성공한 회사원이 고향에 다녀오는 며칠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부끄러워야 했을까.
- 2장 2장: 무진 10km — 사흘 전으로 돌아간다. 소설의 첫 문장은 도로표지판이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리고 이 도시의 명산물이 소개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밤사이 진주해 온 적군처럼 도시를 에워싸는 안개,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의 입김 같은 안개.
- 3장 3장: 서울에서 온 전무님 — 그는 왜 내려왔나. 처가가 소유한 제약회사의 전무 승진을 앞둔 참이었고, 아내가 권했다. '당신 안색이 아주 나빠져서 큰일났어요. 어머님의 산소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가 오세요.' 승진 인사가 정리될 동안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이었다. 성공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아내 쪽에서 온 것이었고, 무진은 그 성공 이전의 자기가 묻힌 곳이었다.
- 4장 4장: 골방에 숨어 있던 청년 — 무진의 과거가 열린다. 전쟁 때 징집을 피해 어머니가 그를 골방에 숨겼고, 그는 그 방에서 수음과 불면과 자기혐오로 젊음을 보냈다. 미쳐 죽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전무님과 그 골방의 청년은 같은 사람이다. 무진에 돌아온다는 것은 그 청년을 다시 만난다는 뜻이었다.
- 5장 5장: 목포의 눈물 — 세무서장이 된 동창 조의 집. 후배 박이 흠모하는 음악교사 하인숙이 있다. 서울 음대 성악과를 나와 졸업 연주회에서 나비부인의 아리아를 불렀던 여자가, 술자리에서 조의 청을 받고 유행가를 부른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윤희중은 그 목소리에서 자기를 본다.
- 6장 6장: 당신은 제 자신입니다 — 두 사람은 안개 속 방죽길을 함께 걷는다. 하인숙은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그는 약속한다. 그리고 옛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가 그녀에게 끌린 이유는 훗날 그가 쓴 편지에 적힌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 7장 7장: 27일 회의 참석 필요 — 아침, 전보가 도착한다. '27일회의참석필요, 급상경바람 영.' 열네 글자가 안개를 걷어 낸다. 그는 하인숙에게 편지를 쓴다.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내겠다고, 믿어 달라고. 그리고 다 쓴 편지를 찢어 버린다.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그 문장들이 이 소설에서 가장 진실한 대목이다.
- 8장 8장: 안녕히 가십시오 — 그는 혼자 버스에 오른다. 떠나기 전 그는 스스로에게 허락을 구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그리고 1장의 팻말이 다시 나타난다. 부끄러움은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면서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을 두고 지금도 해석이 갈린다 — 최소한의 윤리인가, 행동 없는 감정의 면죄부인가. 하인숙을 두고 온 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9장 9장: 스물세 살이 쓴 문장 — 책 밖의 이야기. 이 소설을 쓴 김승옥은 당시 스물세 살이었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란 한글세대의 첫 작가, 4·19를 대학 1학년에 겪은 세대. 평론가 유종호는 그의 문학을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1980년 광주 소식을 듣고 연재를 15회 만에 중단한 뒤 그는 다시 소설을 쓰지 않았다. 무진은 지도에 없지만 순천에는 무진길과 무진교가 있고, 2022년 한 영화가 주제가 안개를 되살리며 이 소설은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